#20201221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날

2022. 6. 13. 20:04To be a Game Changer/인생, 한 권의 책

 눈발이 흩날리던 2020년 12월 21일 육군 논산훈련소로 향했다. 아들의 입대를 배웅해주기 위해서 귀한 시간을 내주신 부모님과 그곳을 향하던 길, 짧게 깎은 머리는 왜 이렇게 어색한지 계속 만졌다. 근처 휴게소에서 갈비탕을 먹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모자를 쓴,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사람이 많았다. 어느 부모님은 벌써 울고 계셨고, 어느 부모님은 유쾌하고 덤덤하게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우리도 나름 덤덤했다. 어차피 가야 하는 군대이기에 빨리 다녀오고 싶었고, 어렸을 적부터 익숙했던 독립적인 생활에 늘 빠르게 적응했었기에 말이다. 그렇지만 마음 한쪽으로는 정말 답답하기도, 불안하기도, 긴장하기도 했다. 20대 초반 꽃다운 청춘에 끌려가는 군대이니 누군들 행복하게 갈 수 있으리라. 사실 부모님 걱정을 시켜드리고 싶지 않아 나름대로 행복하게 가려고 했다. 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쳐다봤을 때 그녀가 숨기고자 하는 빨간 눈시울을 보았을 때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재빨리 못 본 척, 당당하고 씩씩한 모습만을 보여드리고자 애써 모른 척을 하였다.

 

유난히 쌀쌀했던 12월의 어느 날

 

 밥을 다 먹고 다시 차에 올라타 논산 훈련소에 도착하였다. 수많은 인파로 갈 길을 잠시 잃었지만, 내부 인원의 통제로 다른 이들과 터벅터벅 통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그러던 중, 군복을 입은 한 사람이 이곳부터는 부모님은 돌아가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아, 때가 왔구나 싶었다. 어머니를 안아드리고 아버지와는 악수하며 잘 다녀오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갑자기 눈물을 터트리셨다. 맨날 집에서 필자에게 부모는 자식 앞에서 눈물을 절대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 훈련소로 가는 길에 아버지에게 눈물 흘리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하셨던 우리 어머니. 어머니는 눈물 흘리는 모습을 숨기고자 하셨는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아버지에게 안기셨다. 눈물이 나려고 하던 찰나 씩씩하고 용감하게 다녀오리라 다짐했던 스스로가 생각나 뒤돌아서 다시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마음은 쉽사리 떠나지 않아서 그랬는지 다시 뒤돌아봐 부모님을 찾아봤다. 그 수많은 인파 가운데 우리 부모님만 보였다. 우리는 서로만을 봤을 것이다. 부모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어주셨다. 거리가 멀어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래, 잘 다녀와. 잘할 거라 믿는다!"라는 음성이 들려 또 한 번 울컥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갈 길을 가며 눈물을 훔쳤다.

 

 훈련소에서의 시간은 쉽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지역별로 인원이 분류되었고 소속이 정해졌는데 필자는 26연대 5중대 3소대 176번 훈련병이었다. 26-05-03-176이라는 숫자로 분류된 것을 보고 참 미묘했다. 이름이 지워지고 176번 훈련병이라고 불리게 되었을 때 그 느낌이 말이다. 우리는 20-97기였는데 해당 기수부터 코로나가 너무 심해져 격리를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우리 동기들은 좋아했다. 격리를 하면 2주간 아무것도 안 하고 쉴 수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훈련소에서의 격리는 정말 최악이었다. 나중에 언젠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스스로 고생했다고 한마디 해줬으면 좋겠다. 우선 세면세족과 양치를 금지하는 통제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4일씩이나 말이다. 당연히 생활관 밖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되었고 그 좁은 곳에 16명이 모여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쉴 때도 군기를 유지해야 하는 휴식군기 때문이었다.

 

 KF94 마스크는 취침할 때도 착용하고 있어야 했고 너무 답답하여 코까지 내리면 자는 동안 불침번이 깨워서 코까지 제대로 쓰라고, 때로는 분대장(훈련소 조교)이 직접 돌아다니며 검사를 하기도 했다. 화장실도 통제가 되었는데 우선 무조건 전우조로 가야 했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선 생활관에 붙어있는 형광등을 점등해야 갈 수가 있었다. 그것도 예약을 넣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형광등을 켠다고 해서 바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점등의 행위가 의사 표현이기에 화장실을 갈 수 있는 순서를 예약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점등을 해도 30-40분 동안 못 갔던 경우도 있었을 정도로 힘들었다. 세면세족과 양치를 금지한 것은 하루 정도는 참을 수 있었는데 둘째 날부터 도저히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너무나도 기름이 졌고, 입안에서는 어제 먹은 음식의 냄새가 아직도 났기 때문에 말이다. 그것도 마스크를 계속 끼고 있어야 하니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보급받은 물과 수건을 이용해서 생활관에서 몰래 세면하였다. 여기서 왜 몰래라고 하냐면 세면을 위해서는 마스크를 벗어야 했는데, 말했다시피 조교들이 돌아다니면서 마스크를 썼는지 하나하나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는데 얼마나 행복하던지. 그리고 양치를 하고 물로 헹구어 다시 물통에 뱉어 그 양칫물은 짬과 함께 버리거나 화장실에서 몰래 버리기도 하였다

(나중에 양치와 세면세족 금지를 자대에 와서 선임에게 얘기를 할 때면 말이 되냐며 무시당했지만 결국 언론에 퍼지게 되면서 난리가 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곧 없어졌다고 한다)

 

2021년 4월에 해당 내용이 퍼지면서 많은 이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물론 훈련소에서의 하루하루는 최악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이렇게 되돌아보면 인상 깊었던 기억도 많았던 것 같다. 각개전투를 하다가 같은 조의 동기가 장애물을 못 빠져나가자 뒤에서 도와줬던 것이 역효과를 내며 진흙에 자빠졌던 순간. 폭우로 철야 행군이 취소(물론 다음날 주간행군으로 변경되었다..)되자 행복한 마음에 비를 못 막는 우비를 입고 밥을 먹으러 가는데 훈련소에 퍼지는 군가가 마치 해리포터 OST와 같고 분위기 또한 영국 특유의 분위기와 비슷해서 호그와트에 온 것 같다고 웃으면서 떠들었던 순간. 우리 생활관 16명이 취사지원을 하러 갔는데 필자와 함께 밥, 국, 설거지했던 3명의 동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몰래 부식을 들고 도망쳐 죽을뻔했던 순간. 생활관에서 발생한 미스테리한 사건(자고 일어나는데 계속 물건이 없어지고, 칠판 같은 종이에는 이상한 말-예를 들어, 동기 중 이 사람은 정말 싫다 등 갈등을 조장하는 글-이 가득했었던 일)을 해결한다고 밤새 떠들었던 순간. 영하 20도의 날씨에 사격 훈련을 갔던 순간. 짬찌(막내라는 군대 용어) 연대장, 중대장, 소대장 때문에 늘 늦게 씻어서 눈 내리는 겨울에 찬물로 샤워(그것도 맨날 6분밖에 안 준다..)했던 순간. 1시간마다 화장실을 가는 동기 때문에 전우조 없이 보냈는데 조교한테 걸려서 벌로 생활관 복도를 돌아다니며 전우조를 잘 지키자고 외치자 훈련병들이 나와 응원을 해줬던 순간.

 

 그리고 아직도 못 잊는 순간이 있다. 3km 달리기에 떨어졌던 필자는 주말에 보충 수업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게 원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고 우리 때는 중대장이 중대원 중 체력에 불합격한 사람을 전부 모아 주말에 막사 앞에서 체력 보충 훈련을 하였다. 요가 매트를 깔아두고 2인 1조가 되어 팔굽혀펴기, 플랭크, 윗몸일으키기, 스쿼드 등의 운동을 3시간 동안 하였다. 그 추운 날씨에 밖에서 무리하다 보니 다음날 몸살이 와 열이 37.2도까지 올라갔다. 체온 측정병(실제로 이런 병사가 있는 것은 아니고 코로나 때문에 매일 훈련병의 온도를 재는 사람)이 필자를 데리고 조교에게 보고를 드렸다. 그랬더니 조교는 웃으면서 37도는 정상이라고, 본인도 지금 열 재면 그 정도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열을 재보니 36.5도..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37도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그냥 다시 들어가라고 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다음날이 되었는데 목소리가 잘 안 나오고 머리도 너무 아프고 어지럽기까지 하여 다시 열을 재보니 38.1도가 나와 다시 조교를 찾아갔다. 보고를 드렸더니 조교는 화를 내며 왜 이제서야 오냐고 소리를 질렀다. 원래 같아서는 반박했겠지만 말이 안 나와 그냥 죄송하다고 했더니 응급실로 데려갔다. 링거를 맞고 반나절 정도가 지나자 열이 37도 초중반으로 내리긴 했지만, 몸이 여전히 안좋았는데 조교는 괜찮다며 바로 아미타이거(각개 전투, 화생방, 철야 행군을 하는 주차를 의미)에 투입했던 그 순간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물론 선하긴 소대장님 덕분에 무리한 활동은 피할 수 있어 몸은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육군미사일전략사령부의 마크

 

 다사다난했던 훈련소에서의 생활은 점점 끝을 향해 달렸다(아니, 걸어갔다는 표현 어쩌면 기어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5주가 지나 성황리에 수료식까지 잘 마치고 우리는 자대 배치받게 되었다. 동기와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채, 지난날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진짜 군 생활'을 위해서 각자에게 배치된 자대로 떠났다. 필자는 육군미사일사령부(군에 복무하던 시절 2022년 5월 육군미사일전략사령부로 이름이 바뀌었다)라는 곳에 배치받아 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게 기나긴 인생의 페이지 가운데 훈련소에서의 기억이라는 작은 점을 하나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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