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27. 18:13ㆍTo be a Game Changer/Quiet Time(삶의 예배)
약 1년 만에 나갔던 교회였다. 군대에서의 예배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예배와 교회에 멀어졌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신앙을 위해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 동기와 함께 나눔을 하는 등 나름의 노력은 해보았지만, 현실의 벽에 무너질 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의 벽이란 근무 때문에 잠을 5시간도 못 자서 몰려오는 피로감, 그리고 코로나로 인한 예배의 금지 등을 의미한다. 전역한 지금은 그러한 제약이 없어졌지만, 교회에 가는 것이 너무나도 어색하게 되어 미루고 미루다 거의 1년이 지난 것이다. 그렇게 필자는 기대없이 예배드리러 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자며 교회를 향했다.
교회에 많은 인맥이 있지는 않다. 해당 교회에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녔고 중학교 시절에는 캄보디아 선교와 중등부 회장을 역임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어 자연스럽게 원래 다니던 교회에 자주 나갈 수 없게 되었고 대학교마저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 가게 되면서 많은 인연을 교회에서 만나지는 못했다. 필자와 함께했던 셀장, 셀원, 그리고 운동을 함께하는 사람들 정도. 1년이 지나고 만난 그들은 전혀 어색하지 않게 필자를 반겨주었고 덕분에 많은 부담감과 걱정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설교, 오늘은 그 설교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말씀은 신명기 32장 4절 말씀이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여기에서 '공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공의'는 '공평하고 의로운 도의'를 의미하며 가톨릭에서는 '선악의 제재를 공평하게 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품성'이라고 정의한다고 한다. 사실 하나님 하면 많은 이가 '사랑의 하나님'을 떠올린다. 사랑의 하나님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만약 사랑의 하나님만 떠올린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 완전하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쪽 면만을 보고 해석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대표적인 특성이 '사랑'인 것은 맞지만 '공의'라는 키워드 또한 이해해야 한다.
많은 성도는 '공의의 하나님'이 익숙하지 않거나 거부감이 들기도 할 것이다. '아니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왜 벌하고 심판하시는 거지?'와 같은 의문이 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때문에 어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분명 지양해야 함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번 시간에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 알아보자.
시 103:6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성경에서는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하나님에게 '공의롭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온 세상의 재판관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공의를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표현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만약 절대적으로 공의로운 존재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온 세상은 카오스, 즉 혼돈에 빠질 것이다. 그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이곳저곳 휘둘릴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본인의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재판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없다면 각자는 각자의 중심을 만들고 숭배할 것이며 이는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한다. 결국 하나님의 공의는 세상의 중심이며 온 세상의 공의를 이끈다.
역설적으로 공의는 사랑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공의와 사랑이라니 둘의 관계가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공의는 세상을 심판하는 등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결국 '사랑'에서 기인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공의는 십자가로 연결된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굳건한 입장을 보인다. 죄의 값은 공의의 심판으로 치러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한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십자가를 준비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것이다. 공의로운 심판을 위해 독생자인 예수를 보내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공의가 있기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기에 공의 또한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는 '실천'을 강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의로울 것을 명령하며 공의와 정의를 흐르는 물같이 가득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필자와 같은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공의 또한 따라가야 한다. 다만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본인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외적인 것만을 보며 공정하지 않게 판단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판단 자체를 부정하고 비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 각자의 자유며 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의 내용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여 무언가를 그릇되게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설령 그렇게 판단할지라도 본인의 판단과 말, 그리고 행동에는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대하지 않고 갔던 교회에서 필자는 많은 인연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고 예배 또한 집중하며 들을 수 있었다. 최근 필자의 블로그에도 올렸는데 잘잘법을 보다가 김학주 교수님께서 '크리스천은 주식투자해도 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올린 것을 보았다. 그곳에서도 강조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주일 말씀의 전부이자 핵심이라고 본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균형 잡힌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 하나님을 바로 알고 본인 또한 하나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공의를 실천하도록 노력하리라 다짐하였다.
God Bless You
'To be a Game Changer > Quiet Time(삶의 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막 1:21-27 '예수님의 권위' (2) | 2023.02.02 |
---|---|
창 12:1-4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0) | 2022.07.06 |
'크리스천이면 주식투자해도 되나요?', 김학철 연세대 교수 (0) | 2022.06.21 |
'십일조 꼭 해야 하나요?', 김학철 연세대 교수 (0) | 2022.02.02 |
신 6:3-5 '이스라엘아 들으라' (0) | 2022.01.18 |